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건적의 난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|| [[삼국연의(1994)|[[파일:Romance_of_the_Three_Kingdoms_1994_logo.png|width=180]]]]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youtube(nQt215HBEVs, width=100%)]}}} || || '''드라마 〈삼국연의〉 속 '황건적의 난' 묘사[br](1994년 ~ 1995년 방영)''' || 중국의 [[한나라]] 말기 [[영제(후한)|영제]]가 통치하던 184년에 일어난 종교집단 [[태평도]]의 교주 [[장각]]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봉기 혹은 [[역성혁명]]이다. 거록 출신인 [[장각]]이 후한 말기에 성행한 [[황제]]와 [[노자]]를 교조로 삼는 종교인 황로도([[태평도]])를 통해 신도들을 모아서 스스로를 "대현양사"라 자칭하고, 그 무리들을 모아 신봉자들에게 과오를 깨우치게 하고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 따위를 사용하여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치는 등의 전형적인 종교집단의 활동을 전개하여 무리들을 이끌어 모았다고 한다.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 황로도를 전파하여 [[청주(중국)|청주]], [[서주]], [[유주(중국)|유주]], [[기주]], [[형주]], [[양주(중국)|양주]], [[예주]] 등의 8주에 무리들이 퍼졌으며, 황실의 [[환관]]들과 내통 약속을 받아내는 등 치밀하게 거사 준비를 했으나, 이 사실이 제자들의 밀고로 발각되자 동생인 [[장보]], [[장량(삼국지)|장량]]과 함께 184년에 전국적으로 난을 일으켜서 각지의 주ㆍ군들을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이는 등 온 세상에 세력을 떨쳤다. 그 뒤, 조정에서 [[황건적]] 때문에 고전하게 되자 [[당고의 금|당인(청류파)]]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서 그들을 중심으로 관군들이 편성되었고, 각지에서 황건적들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점차 진압이 되었고, 그 와중에 난의 주모자인 장각이 도중에 병사하여 중심을 잃었다. 그럼에도 황건적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아서, 각지에서 독립적인 군소 세력이 할거[* 황소, 하의, 관해, 유벽, 서화, 사마구 등.]하였고, 이 때문에 때때로 지방관이 계속 토벌에 나서야 했다.[* 사서의 황건적 토벌기록이 경우에 따라 184년이 아닌 시기에도 있다. 도겸의 파견기록이 그 예시.] 이들 잔당의 일부는 각 군웅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[[청주병]]. 황건적의 난은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온 셈이다. '''그리고 [[삼국시대(중국)|삼국시대]], 아니 더 나아가서 앞으로 4백여 년 동안 이어질 [[위진남북조시대]]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대배경이기도 하다.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